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슈베르트 (문단 편집) ==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 == >'''"매일 밤 침대에서 잠들 때마다 다음날에 눈을 뜰 수 없다면 좋겠다."''' - 프란츠 슈베르트 본인 슈베르트는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일찍 [[요절]]한 음악가로 보통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반론도 있다. 슈베르트 연구가이던 오토 비버의 주장에 의하면 슈베르트가 1822년에 악보 출판 수입으로 2000굴덴을 받았다는 것을 세월이 지나 발견했는데 이 액수는 당시 공무원 10년 이상 근무자 연봉이라는 거액이다.[* 40년 이상 세월이 있기에 물가 차이가 있겠지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가 궁정음악가로 받은 첫 연봉이 600굴덴이었고, 그 이전 궁정음악가였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1714~1787)가 20년 넘게 연봉 2500굴덴을 받았다고 한다. 그 밖에 오토 비버의 기록에 의하면 1820년대 오스트리아 우체국 직원 초봉 연봉이 350굴덴, 군 소위 연봉은 450굴덴이라고 한다. 그리고 베토벤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9번 교향곡 초연 때 420굴덴을 벌어들였다(베토벤 본인은 2000굴덴 쯤은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했다가 예상에 미치지 못하자 실망했다). 즉 슈베르트가 받은 수입은 당대 거장이던 베토벤의 신작 발표회 수입에 버금가는 거금이었던 것.] 자세히는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한 게 사실이며, 저 돈은 바로 성악가로 인맥이 있던 미하엘 포글과 위에서도 언급된 후원자, 레오폴트 폰 존라이트너가 그의 마왕 악보 판권을 사주면서 1822년 내준 것이다. 당연히 [[듣보잡]]인 슈베르트의 음악을 어느 출판사에서도 발매해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후원자였던 존라이트너가 자비로 악보를 내주고 이를 음악계에 알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존라이트너가 저 거액을 지급한 것. 게다가 저 거액이 악보 출판 수입보다는 슈베르트를 굉장히 좋아하던 존라이트너가 반거짓말로 내준 돈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기에 인정받았다고 하기에는 아리송하다. 그렇긴 해도 제법 부유한 후원자가 곁에 있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이 잡혔다는 뜻이기에 슈베르트가 가난으로 비참한 삶을 누렸다는 것도 결국 잘못 알려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슈베르트는 돈에 얽매이지 않아서 후원자였던 존라이트너가 되려 곤란해 했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돈을 벌어도 다른 가난한 예술가 후배나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같이 나누기도 하고 생활비를 도왔다고 한다. 그와 친구였고 같이 가난한 시절을 겪었다가 나중에 화가 및 조각가로서 크게 성공한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t, 1804~1871)[* 나중에는 뮌헨 아카데미 조각과 교수를 역임하고 유럽 유명 성당을 비롯하여 영국이나 프로이센 등등 유럽 각지 왕실에게도 조각이나 그림을 주문받을 정도로 이름을 알렸다.]가 남긴 회고록에 그 때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야기가 나와있다. 하루는 좀 돈을 어느 정도 벌게 된 다른 친구가 슈베르트와 슈빈트의 사정을 알았기에 그들에게 모처럼 밥 좀 산다고 했다. 이 자리에 나온 슈베르트는 그 자리에서 10분도 안 가서 큼직한 빵을 6개나 단번에 먹어버리고 차도 여러 잔을 얼른 비워버렸다. 그리고 좀 늦게 자리에 나타난 슈빈트도 그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도 똑같이 그렇게 먹어버렸단다. 다른 이들이 이 둘을 보고 놀라며 "그리도 배가 고팠나?" 하자 두 사람은 '''"이틀 동안 물 빼고 아무 것도 못 먹었다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슈빈트는 이 글을 쓰면서 자신은 그래도 나중에 성공해서 이제 굶주리는 일은 없지만 그렇게 배고픈 상태로 죽어간 슈베르트를 너무나도 안타까워했고 그의 사망 소식을 듣었을때는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 다만 위에 악보 판매 일을 보면 이 이야기가 친구들이 그의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 이미지를 위하여 왜곡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다만 다른 기록을 보면 슈베르트가 가난하게 살아간 것도 맞다고 볼 수 있다. 1817년 3월에 친구 슈파운이 쓴 글을 보면 이미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성악가 포글이 나이 스물을 갓 넘긴 슈베르트를 처음 만났는데, 나이도 50에 가까운데다 풍족하게 살면서 꽤 잘 차려입은 포글과 달리 꾀죄죄한 차림에 헝클어진 머리 스타일을 하고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나온 슈베르트를 보자 얼굴에 '뭐야 이 녀석은?'이라는 실망감이 단번에 나타났다고. 물론 슈베르트의 음악 실력을 본 포글의 실망은 금세 감탄으로 바뀌었고, 포글이 자네같은 인물이 뜨지 못하고 있다니 놀랍다면서 뭐 도와줄 게 있느냐고 물었는데 단번에 "'''배가 고프네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에 포글은 쓴웃음을 짓더니 후하게 한턱 냈다고 한다. 이렇듯 포글이나 존라이트너 경 같이 그를 아낀 친구들이나 후원자들이 백방으로 그를 인정받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슈베르트는 생전에 끝내 유명세를 타지 못했고, 그가 지은 몇몇 가곡들의 악보가 출판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한편으로 슈베르트가 생전에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은 특유의 소심한 성격탓도 있다. 슈베르트는 자신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평생의 스승 베토벤조차 그가 죽기 1주일 전에 지인들 주선으로 간신히 만났을 정도로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는데, 아무래도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일찍 이름을 날리기는 쉽지 않다. 슈베르트 사후 그의 음악을 본격적으로 널리 알린 사람은 [[로베르트 슈만]]으로, 슈만은 우연히 슈베르트의 가곡 악보들을 보고 크게 놀라서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널리 알렸다. 슈베르트는 사후에 뛰어난 음악가로서 재평가를 받게 된 데에는 슈만의 공이 매우 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